우리가 사용하는 요가는 산스크리트어 '유지'가 그 어근으로, '얽어맨다' '결합한다 ' '붙인다' 멍에 씌우듯 이어 붙인다' 등의 뜻과 주의력을 이끌어 주며, 집중시키며, 그것을 사용하고 응용한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결합이라든가 영적인 교감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들 의지와 신의 의지와의 진정한 결합을 의미한다.
마하데브 데 자이는 「간디가 해석한 기타 Gita」의 서문에서 "요가는 육체와 마음과 영[魂]의 모든 힘을 산에 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요가의 전제가 되는 지성, 마음, 감성, 의지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인생(삶)을 여러 각도에서 평등하게 바라볼 줄 아는 정신의 안정된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요가는 인도 6대 철학 체계 중의 하나이다. 파탄잘리는 195개의 간결한 경구로 이루어진 그의 고전적 저서 「요가 경 Yoga Sutfas」에서 요가를 통합 정리하고 체계화시켜 놓았다. 인도 사사에서는 모든 사물에는 절대의 우주정신인 파라 마트마다 존재하며 개개인의 정신인 지바트라는 그 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요가의 체계는 개개인의 정신이 절대의 우주정신에 합일되거나, 교감하는 수행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며, 또 이 방법을 통해서 해탈 MKSA에 이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요가의 길을 따르는 남자 수행자를 요기 yogi, 여자 수행자를 요긴 yo gin이라 한다. 요가 철학에 관한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는 저서인 「바가바드기타」 제6장에서 크리슈나 Sri Krishna는 아르 쥬나 Arjuna에게 요가의 의미를 고통과 비애로부터의 해방으로 설명한다.
"사람의 마음과 지성과 자아 ahamkara가 쉼 없이 헐떡거리는 욕망으로부터 절제되고 자유로워질 때 그들은 내재하는 정신에 안주하게 되고 비로소 육 타 Yukta, 즉 신과 교감하는 존재가 된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서 등잔불은 깜박이지 않음과 같이, 내재하는 정신세계에 몰입함으로써 마음과 지성과 자아를 제어할 줄 아는 요기도 이 같은 경우다. 요가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불안정한 마음, 지성, 자아가 평정해질 때 그 안에 내재하는(靈) 것의 가피에 의해서 법열을 맛보게 된다. 그때 그는 이 기쁨이 그의 이성으로는 체득할 수 없는 감지의 한계를 넘어선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그 실체에 정주(定住)하게 된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어떠한 비애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이것이 고통과 비애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의미의 요가이다."
"잘 깎인 다이아몬드가 많은 면을 갖고 각각의 면에서 상이한 빛과 색을 내듯이, 요가라고 하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면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어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얻고자 정진하는 모든 영역에 걸쳐 다양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바가바드기타」 역시 요가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하고 있는데, 특히 카르마 Karma 요가를 강조하고 있다. 즉, "몸을 움직여 일한다는 그 자체가 은전(恩典)이며 특권이므로,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단코 일을 멈추지 말 것이며 이기적 욕망을 버리고 신의 이름으로 일하라, 성공이나 실패에 구애받지 마라. 이러한 마음의 안정 상태를 요가라 한다. "
요가는 또한 행동들을 함께 있어서의 지혜 또는 슬기로운 삶, 조화와 중용을 나타낸다. "요가는 너무 먹거나 또한 전혀 안 먹는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또, 너무 많이 잠을 자거나 전혀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다. 먹고 휴식을 취하는 데 있어서의 절제와 일을 함에서의 조절 그리고 잠자고 깨는 데 있어서의 조화로 요가는 모든 고통과 비애를 없애 준다."
「카트 우파니샤드 Kathopanishad」는 요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감각이 가라앉고, 마음이 안정되고, 지성이 동요됨이 없을 때, 그때를 지인들은 이르기를 최고의 단계를 이른 것이라고 한다. 모든 감각 기능들과 마음 상태의 확고한 통제를 요가라 한다. 이것을 이룬 이는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요가 경」의 제1장 두 번째 경구에서 파탄잘리는 요가를 '치타 즈바리 티 니로다 Chita vrtti nirodhah'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적 ch itta 변화 vrtta의 제지 nirodhah 또는 의식 ch itta 동요 vrtta의 억제 nirodhah로 해석된다.
치타 ch itta라 하는 말은 총체적 혹은 집합적 의미로서 넓은 의미의 마음을 지칭하며 다음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1) 협의의 마음(manas, 선택하고 거부하는 능력과 힘을 지닌 개개의 마음인데, 이것은 흔들리기 쉽고 우유부단한 마음의 작용이다. (2) 지성 또는 이성(buddhi, 이것은 사물을 구분해 판별, 결정짓는 상태를 말한다.) (3) 자아(ahamkara, 글 뜻대로 하면 나를 창조하는 주체, 즉 '내가 안다'라는 것을 확신하는 상태를 말한다.)
브리타 vrtti라는 말은 방향을 틀다, 회전하다, 구르다의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 어근 '바르트 VTR'에서 온 말로써 행동의 과정, 행위, 존재하는 방식,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 요가는 들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에너지를 조직적인 채널로 바로 전해 주는 수단이다. 마치 거대한 강이 댐이나 운하로 잘 이용되면 큰 저수지가 되고, 가뭄을 막아 주고, 풍부한 전기를 산업체에 제공하듯이, 마음도 적절히 조절될 때 평온의 저수지가 되어 인간을 향상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만든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문제는 「바가바드기타」 6장에 나오는 아르 주는지와 크리슈나의 대화에서 보듯이 결코 쉽게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크리슈나여, 당신께서 저에게 요가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언제나 하나이신 브라만(Universal Spirit, 우주정신)과의 영적 교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늘 들떠 있고 쉽게 변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영원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충동적이고, 고집스럽고, 거칠고, 제멋대로여서 바람을 다스리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크리슈나가 대답하였다. "마음은 불안정하여 다스리기가 힘들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마음 상태는 '끊임없는 수행(abhtasa)'을 통해서, 또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남(vairagya)'을 통해서 순화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은 이 성스러운 교감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제어를 하는 사람은 그가 부지런히 정진하고 그의 에너지를 올바른 방법과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면 이것은 충분히 이룰 수 있다."